심리학자가 분석하는 친일파 후손 논란
세 줄 요약
- 이 논란은 후손 책임 문제가 아니라, 청산 못 한 역사를 개인 한 명에게 떠넘기는 방식의 문제다.
- 분노는 정의가 아니다. 제도와 기록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도덕적 만족만 남는다.
- 후손에게 물을 것은 혈통이 아니라 태도다. 청산은 한 사람의 추락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다.
분노는 청산을 대신할 수 없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개인 한 명에게 떠넘기는 방식이 드러난 사건이다.
한 사람을 비난하고 다시 잊는다면, 과거는 해결되지 않는다.
배우 하영은 증조부의 이력을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가족의 자랑으로 소개했다. 이후 증조부 안상호가 일제강점기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포함됐다는 기록이 알려졌다. 소속사는 사실 무근이라는 기사를 띄웠으나, 곧이어 하영 본인이 이를 인지하고 집안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논란은 곧 후손의 책임 문제로 번졌다.
조상의 잘못을 후손에게 물을 수 있는가.
가족의 영광을 내세웠다면 과오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가.
후손은 어디까지 사과해야 하는가.
그러나 핵심은 따로 있다.
왜 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개인에 대한 분노와 파멸로 처리하는가.
청산은 응징이 아니라 정리이자 새출발이다.
사실을 밝히고, 부당한 이익과 명예를 바로잡고, 피해와 저항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다.
분노와 처벌은 청산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해방 직후 친일 청산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해 조사에 나섰지만,
1949년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과 정부의 방해 속에서 사실상 무력화됐다.
친일 청산이 실패한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정치권력과 냉전 질서,
친일 경찰과 관료의 재등용에 있었다.
이 글은 그 실패의 원인보다,
그 실패의 유산을 다루는 방식을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정치와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유명인 한 명의 도덕성 문제로 축소하면
그 안에 근본적인 실패 이유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분노는 완벽한 정의가 아니다
그러나 분노했다는 사실만으로 책임을 다한 것은 아니다.
제도와 기록으로 이어지지 않은 분노에는 도덕적 만족만 남는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처벌을 공동체가 자신의 도덕적 경계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중요한 가치가 침해됐을 때 함께 분노한다.
그 분노를 통해 집단의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그 집단이 지켜야할 가치를 재확인한다.
이 측면으로 보면 친일 행위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식민 통치에 협력한 행위를 미화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기준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끝까지 지켜낸 민족의 자부심도 고취된다.
그러나 분노로 형성된 '도덕적 만족'과 '역사적 청산'은 다르다.
한 사람을 비난했다고 독립운동가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광고가 내려갔다고 부당한 재산이 환수되는 것도 아니다.
당사자가 사과했다고 역사교육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분노가 사실 규명과 제도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우리는 옳았다”는 감정뿐이다.
공공의 적이 생기면 질문이 사라진다
그러나 누구를 미워할지만 합의한 집단은 무엇을 바꿀지 논의하지 않는다.
문제 해결보다 분노의 공유가 목적이 되는 순간 연대는 독성을 띤다.
에릭 호퍼는 공동의 적이 사람들을 빠르게 하나로 묶는다고 보았다.
즉, 누구 하나를 잡고 여러 사람이 비난하는 건 무척 쉽다.
반면에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합의하는 일은 어렵다.
- 왜 친일 청산이 실패했는가.
- 어떤 행위가 어떤 이익으로 이어졌는가.
- 현재 남아 있는 부당함은 무엇인가.
-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이런 복잡한 질문은
"그러니까 쟤가 악당이라는 거지?"
라는 해로운 유대(Toxic Solidarity) 뒤로 사라진다.
해로운 유대란,
같은 사람을 얼마나 강하게 비난하는지로
서로의 소속과 도덕성을 확인하는 결속을 뜻한다.
이러한 유대감은 다른 의견을 배신으로 취급한다.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면 악인의 편으로 몰아간다.
사과하지 않으면 뻔뻔하다고 하고,
사과하면 진정성이 없다고 한다.
반면에, 건설적인 연대는 새로운 사실 앞에서 판단을 수정한다.
개인의 책임과 구조의 책임을 구분한다.
해결할 목표와 책임의 범위를 제시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여론은,
해로운 유대의 좋은 표본이다.
소셜미디어는 성급한 판단을 신념으로 만든다
성급한 판단도 공감과 공유를 받으면 자신의 정체성과 결합한다.
그 순간 의견을 바꾸는 일은 집단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진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생각과 표현의 순서가 뒤집힌다.
충분히 생각한 뒤 의견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생각을 굳힌다.
짧은 정보만으로 분노하며 단정적인 문장을 공유한다.
그 문장이 많은 공감을 얻으면 판단은 확신으로 변한다.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톡 대화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톡에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착한 사람',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진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연락하는 사람,
나의 억울함을 유발하는 프레임에 동조할 사람,
그들을 톡 목록에 두고 살기 때문이다.
공감의 동물인 사람은
자신과 같은 반응이 반복될수록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렇게 단단한 프레임이 생기면
이후 새로운 사실이 나타나도 생각을 바꾸기 어렵다.
다시 친일 논란으로 돌아와보자.
친일 행위가 잘못이라는 판단과
그 책임을 현재 누구에게 어떻게 물을 것인지는 함께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해로운 유대감으로 결속된 집단에서는
책임의 범위를 묻는 것조차
친일을 옹호하는 말로 취급된다.
지금 집단에서 왕따를 당할까봐
이미 왕따인 사람을 더 심하게 괴롭히는 행위와 같다
비판이 파괴의 욕망으로 바뀔 때
사과와 정정 뒤에도 요구가 끝없이 높아진다면 책임보다 파괴가 목적이 된 것이다.
타인의 추락은 비판하는 사람의 도덕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공격성과
파괴 자체에서 만족을 얻는 공격성을 구분했다.
잘못을 밝히고 정정을 요구의 당연히 필요하다.
역사 왜곡과 미화에 책임을 묻는 것도 정당하다.
그러나 상대가 얼마나 더 잃어야 하는지를 묻기 시작하면,
목적이 달라진다.
광고에서도 내려오고, 직업 활동을 멈추고,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해야한다든지...
'불행하라는 요구'가 끝도 없이 발생한다면
그 비판의 목표는 반성과 변화가 아니다.
상대의 파멸이다.
누군가의 추락을 즐기는 은밀하고 어두컴컴한 놀이인 것이다.
후손에게 물을 것은 혈통이 아니라 태도다
다만 조상의 명예를 공적으로 내세웠다면 오류를 정정할 책임이 생긴다.
후손에게 출생이 아니라 과거를 인정하고 바로잡는 현재의 태도로 평가해야 한다.
후손은 조상의 행위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행동을 막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조상의 죄를 혈통에 따라 물을 수는 없다.
특정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사과하며 살라고 요구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그러나 조상의 명예를 자신의 공적 서사로 사용했다면
그 이야기를 확인할 책임이 있다.
잘못된 사실이 드러났다면 정정해야 한다.
후손에게 물을 것은 조상의 죄가 아니다.
과거를 부정하는가.
친일 행위를 미화하는가.
잘못된 가족사를 계속 자신의 명예로 사용하는가.
아니면 사실을 인정하고 발언을 바로잡는가.
논란이 된 연예인에게 물을 책임도 이 범위에 있다.
증조부의 삶을 대신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검증하지 않은 가족사를 공적으로 자랑한 자신의 발언을 정정하고
앞으로 그 역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책임지는 일이다.
사과의 진정성은 이후의 행동으로 판단하면 된다.
사실을 인정한 사람과
끝까지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을 똑같이 취급한다면,
태도의 변화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과거 청산은 한 사람의 추락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다
깊이있는 변화가 없다면 분노는 단순히 표출로 끝난 것이다.
진정한 청산은 다시는 부정한 일의 댓가를 이익과 명예로 보상받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이번 논란은 한 배우의 가족사에 관한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청산하지 못한 사회가
과거를 처리하는 방식이 드러나 있다.
우리는 친일 청산을 원한다.
과거의 잘못이 미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부당하게 형성된 명예와 이익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에도 분노한다.
그런데 분노를 표출하고
당사자가 타격을 입는 모습을 보고 끝난다면
그것은 청산이 아니다.
진정한 청산은
부당한 일에 협력한 선택이
더 이상 명예와 이익으로 보상받지 않는 사회,
아무리 돈을 많이 벌 수 있어도
가치와 긍지 앞에서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회,
과거를 숨기는 것보다,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